
적호의 중관장엄론 6
● 제4장 결론
1. 적호의 종교적 철학적 입장
1) 세속제의 세계는 유식唯識에 다름 아니다
2) 유식무아
3) 불생의 해석에 근거한 유식설로부터 중관설로의 향상
2. 여래의 가르침의 정수
1) 타학설에서 발견되는 대승의 가르침
(1) 베단타 • 비슈누 • 쉬바 • 상키야
(2) 슈바굽다
2) 비교할 때 없이 뛰어난 공성설
참고문헌
1) 전집 • 학술지 약호
2) 원전 약호
3) 번역과 연구 자료
● 부록 - 중관장엄론에 대하여
1) 중관학파의 공사상
2) 적호와 《중관장엄론》
3) 중학파 공사상의 실천적 의미
● 제4장 결론; 91-97
1. 적호의 종교적 철학적 입장; 91-93
(1) 세속제의 세계는 유식에 디름아니다; 91
자기 인식(自己認識)도 세속제에 속한다는 것은 단일하거나 다양한 자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음미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미 설명한 것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다.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종(宗)으로 해서 여러 나쁜 견해를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이 생각하는] 세속의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세속의 존재는] (1) 심(心) · 심소(心所)만을 자체로 하는 것인가, 혹은 (2) 외계의 사물을 자체로 하는 것인가? 56)
※주 56) '두 가지 중관의 길'이라는 표현을 판지카에서 발견할 수 있다. MA, p.291:6. 경행중관파(經行中觀派),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는 말은 볼 수 없지만, 적호(寂護)와 연화계(蓮化戒)는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갖는 중관 논사로서 청변(淸辨)을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또 경행중관과 유가행중관파라는 말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御牧(Mimaki, 1982) p.40, p.43. p.45, p.47; 송본(1981) 'lTa bai khyad parに- おけ る中觀理解につい、て(曹洞宗研究員研究生硏究紀要第13號) p.98, p.113 참조.
이 경우 어떤 사람은 후자의 생각에 근거해서 '논서 가운데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라고 말해져 있는 것은 작자(作者)와 향수자(享受者)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중관심론' v. 28c-d)'라고 말하는 사람, [즉 청변淸辨]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자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91.
원인이나 결과로서 있는 것도
다만 지식(知識)에 지나지 않는다.
(대상도 없이) 스스로 성립해 있는 어떤 것,
그것이 지식이라고 결정된다.
'(대상도 없이) 스스로 성립해 있다'라고 하는 존재 방식과 다른 지식의 존재 방식은 생각될 수 없다. 스스로 성립해서 있는 것의 본체도 꿈이나 환영 등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1) 색(色)이나 형상(形象) 등이 외계에 있다고 생가한다면, [그것은] 지식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되지만, 역시 안(眼) 등과 마찬가지로 동시이든 혹은 동시가 아니든, 근접한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지각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宗) 그것들에 대한 지각(知覺)은 동일한 청靑[의 지각] 속에 있는 청 등의 형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因) 지각을 본성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喩) 꿈이나 환영 등에 있는 색(色)을 지각하는 것과 같다.
(2) 만약 '지식에 형상을 가져오는 대상이 결과[인 지식]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추리된다'[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역시 [그것은] 직접지(直接知)로서 성립해 있는 것이 아니고 추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그 [대상]은 비존재로서 확정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반드시 있고, 극미(極微) 등은 부정되기 때문에, [지식은 스스로 성립한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들의 '대상없이 지식은 스스로 성립한다'는 견해는] '밀엄경(密嚴經)'과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해지는 여러 가지 내용과 일치한다.
'입능가경(入楞伽經)'의 다음과 같은 말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외부에 색이나 형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마음이 외계의 사물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x. 489a-b)
(2) 유식무아; 92
[그러나] ('기기서 유심唯心 그것은 실유(實有, satya)인 것인가?'라고 말하면) 지력(知力)이 적지 않은 사람들(인 불세존佛世尊), 특별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인 범부와 보살)도, 그 마음에 대해서 단일하기나 다양한 자성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때, 승의로서는 핵심(核心, sara)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유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2.
유심唯心[의 이론]에 근거해서
외계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일체법은 무자성이라고 하는) 이 이론에 근거해서
그 (유심의 이론)에도
진실로 자체(自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유심의 이론에 근거해서 상응(相應), [즉 심소心所]를 갖는 (sa-samprayoga) 마음과 다른 것이라고 말해지는 아(我)와 아소(我所), 소취(所取)와 능취(能取) 등이 무자성이라는 것이 손쉽게 이해된다.
(유심이라고 하는) 이 이론에 관련해서 [볼 때], 자립적으로 존재하는(svayambhu) 사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마음도 무자성이라는 것이 이해된다. 그러나 또 여러 극단적인 견해가 배제된 이 중도(中道)가 이해될 때, 단일하거나 다양한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마음도] 무자성이라는 것이 한층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 '이세간품(離世間品)'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을 깨달아 들어가는 단계를) 교묘하게 설한 것이다.
'오, 승자의 아들들이여, 다시 또 삼계(三界)에 속하는 것은 다만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된다. 삼시(三時)도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 마음도 또 [양] 극단(極端)과 중간이 없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여기서 생(生) · 주(住) · 멸(滅)이라고 하는 3상三相속에] 생과 멸이라는 [두 가지] 극단 및 중간의 주(住)라고 하는 상(相)이 없으므로, '[마음은 양] 극단과 중간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법집경(法集經)'에도 다음과 같이 말해져 있다.
'세존이시여, 일체법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을 그 핵심으로 해서 유심(喩心)이라고 결정되며, 실체가 없고, 환영과 같고 뿌리가 없는 사물입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요가행자는 유형상有形象] 유식에 근거해서 외경(外境)을 분별해서는 안 된다. 진여眞如(를 상相으로 하는) 인식 대상에 [마음을] 멈추고 [유형상] 유식을 넘어설 수 있다. (x.256)
② [유형상] 유식을 넘어선 후, 또 (능소能所라는 두 가지의) 무현현無顯現[을 설하는 무형상無形象 유식의] (지혜智慧에 집작하는 것)도 초월해야 할 것이다. [또 그 무형상 유식에서 설하는 무현현의 지혜도 넘어선] 무현현[의 지혜]에 머무는 요가 행자는 대승을 본다. (x. 257)
③ (요가 행자의 경지는 이미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기 위한] 노력은 불필요하다. (여러 희론戱論이 진정되어 있기 때문에) 적정寂靜이고, (유정의 이익을 바라는) 본원本願에 의해서 청정하다. (그 경지에서) 지혜는 가장 뛰어나서 무아無我이고, (이) 무현현(의 지혜) 가운데서 (자성을) 보지 않는다. (X. 258)
(3) 불생의 해석에 근거한 유식설로부터 중관설로의 향상: 93
또 ('입능가경'에서)
① (5가지) 인연의 부정否定과 능작인能作因의 부정(에 의해서) 유심唯心을 확정하는 것이 (유기식성唯記識性의 이론에서) 불생不生이라고 하는 것임을 나는 설한다. (x. 592)
② 여러 법은 외계의 사물도 아니고 마음에 포함되는 사물도 아니라(고 나는 설한다). 여러 견해가 부정되기 때문에 [여러 법은] 불생을 상(相)으로 한다. (이것이 중관파의 이론에서 불생이다.) (x. 595)
이에 대해서 (용수는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가운데서) 이렇게 말한다.
① 어떤 발생하는 법도 없고 소멸하는 법도 없다. 다만 지식만이 생하고 멸할 뿐이다. (21)
② 말하는 바의 대종(大種)은 지식에 귀착된다. [그러나] 그 [지식]은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끊어지기 때문에 [그 지식도] 부당한 상상이 아닌가? (31)
93.
(중관과 유식이라는) 두 가지 학설을 [바퀴로] 가지는
마차에 올라,
논리학의 고삐를 쥔 사람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여실한
대승 [교도]의 지위에 도달한다.
효력 있는 사물을 근거로 하는 추리(vastubalapravrtta numana)를 행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설해진 바의 두 가지 학설에 의해서 이루어진 여래들이 차례로 타고 갔던 (yatanuyata) 대승에 의해서 일체 사물의 무자성을 이해한다. 훌륭한 마차에 탄 사람들이 [말의] 입에 묶은 고삐를 교묘하게 쥐는 것처럼, 의미 심장한 대승이라는 진실을 [교묘하게] 획득한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는 그 두 가지 학설에 의해서 이루어진 대승이 요약해서 설해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5법(五法) · [3]자성(三自性) · 8식(識) · 2무아(二無我 )라는 것으로 모든 대승은 정리된다.' (x. 638)
2. 여래의 가르침의 정수; 94-97
(1) 타학설에서 발견되는 대승의 가르침
1) 베단타 · 비슈누 · 쉬바 · 상키야
이 (유식과 중관이라는) 두 가지 학설은 브라만 · 비슈누 · 비루파쿠샤 등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말해졌지만, 이 대승에는 어떤 뛰어난 점이 있는가?
예를 들면, '암리그빈두라하샤(Amptabindulahasya)'에는 (유식설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식識, (즉, 아트만)만이 언제나 청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깨달아진 것이고, 항상 (탐貪 등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있고,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브라만이고, 근심이 없고,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차라트라 학파에서는 다음과 같이 (중관의 학설이) 설명되어 있다.
① 단순한 명칭을 넘어서 존재와 비존재를 배제하고 발생과 합체合體, [즉 사멸死滅]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그 (최고아最高我)를 바수데바라고 부른다.
② 존재하는 사물에 [최고아의] 존재성이 없고, 비존재의 사물에도 [그런] 존재성이 없다. [사물들이] 존재와 비존재를 떠나 있다고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베다를 아는 것이다.
쉬바의 '쉐차르와'에는 57) (중관의 학설이) 다음과 같이 '부자일체장(父子一體章, pitaputrayoga)'에 소개되어 있다.
주 57) 서명書名을 확정지을 수 없으므로 티벳트어의 음사音寫로 표시해 둔다.
'오, 아들이여, 최고의 진실이고, 지식이 자재하고, 편재하는 브라만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것도 (속박의) 고리라고 설해진다.'
[또] 큰 신선인 카필라(Kapila)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 구나(guna)의 궁극적인 자성은 지각되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지각되는 영역에서 얻어진다면, 그것은 환영과 같이 실로 공空한 것이다.' ('바르샤가스야')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여래의 아들[인 불교도]와 공통하는 소작(所作)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은 것은 없다. 일체법의 자성을 공이라고 설하는 것은 여래의 사자후(獅子吼)이고, 다른 학파의 코끼리와 사슴 무리를 두렵게 한다.
이단(異端)의 다른 학파에 속하는 반론자는 모두 아트만 등의 견해에 집착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공성을 설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비밀론자秘密論者[인 베단타(vedanta) 학파]를 따르는 사람들은 '최고아(最高我)는 유일한 것이고, 지식의 자성에 지나지 않으며, 대공(大空)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 경우 요가를 실수(實修) 함에 의해서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무명을 떠나, 병(甁) 등이 부서지면 그 [병 속의] 허공이 대공과 합체하는 것처럼, 개아도 그것에 흡수되기 떼문에, 논자들은 그 개아(個我)와 속성(屬性)과 원소(元素) 등은 무한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세간은 환영을 자성으로 하고 불이(不二)이지만, 꿈을 볼 [때와] 같이 여러 가지 본성을 가지고 현현한다.
이 점에 대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만투캬송'에서) 말하고 있다.
① 마치 병(甁) 등이 파괴될 때, 병 속에 있던 허공 등이 [큰] 허공 속에 몰입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여러 개아個我도 [신체 등의 집합체가 소멸할 때] 이 아트만 속으로 몰입한다. (iii. 4)
② 또 실로 각각[의 병甁]에서는 외적인 형색(形色) · 신체 · 명칭이 다르더라도, [큰] 허공에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개아에 관해서도 [그와 동일한 도리가 있다]고 결정된다. (iii. 6)
③ 마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허공이 더러운 것에 의해 오염[된다고 보여지는] 것처럼, 그와 같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트만도 또한 더러움에 의해서 오염된다[고 보여진다]. (iii. 8)
④ 마치 어둠 속에서 그 본성을 확인한 수 없는 밧줄이 뱀과 같이 가늘고 길게 연속하는 사물로서 분별되는 것처럼, 아트만도 또한 그와 같이 [진실한 모습과는 달리 여러가지로] 분별된다. (ii. 17)
⑤ 마치 밧줄인 것이 확실하게 알려질 때, [뱀 등이라고 하는] 망분별(妄分別)이 소멸해서 '밧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불이(不二)에 대한 이해가 발생하는 것처럼, 아트만에 대한 결정적인 지혜도 그와 같다. (ii. 18)
⑥ [아트만은] 생기生起 등과 같은 이들 무수한 것으로 분별되고 있지만, 그 [아트만이] 스스로를 모르는 것은 그 신(神)의 불가사의 한 힘(maya)이다. (ii. 19)
⑦ 생기生氣를 아는 사람은 [세계의 원인은] 생기라고 말하고, 또 원소를 아는 사람은 원소라고 말하고, 구성요소(guna)를 아는 사람은 구성요소라고 말하고, 또 원리(tattva)를 아는 사람은 원리라고 말한다. (ii. 20)
⑧ 마나스(manas)는 [본래] 불이不二이지만, 꿈에서 둘로 현현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어 있을 때에도 불이(不二)의 사물이 둘로 현현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iii. 30)
⑨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이 두 가지로 보여지고 있는 것은 마나스이다. 왜냐하면 마나스가 활동하지 않는다면 둘로서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iii. 31)
⑩ 그 [마나스]가 아트만이라고 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망상을 떠나게 될 때, 마나스가 아닌 상태에 도달한다. 소취所取[인 객관]이 없기 때문에 그 (주관의) 인식도 없다. (iii 32)
상주하는 아트만이라는 견해, 즉 불이(不二)를 설하는 사람들인 그들 모두의 학설은 이전에 부정해서 마쳤다. 또한 [아트만을 인정하는 베단타(Vedanta)의 입장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해탈하면 모두가 해탈하는 것이 되고, 한편 해탈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바라면서도 해탈하지 않는다[고 하는 불합리한] 것이 된다. [양자는] 상위相違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모순하는 성질을 가지는 것이 되어 다른 사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① [아트만을 인정한다면] 요가 행자는 요가의 수행에 의해 무엇을 소멸하고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상주常住하는 지혜]를 본성으로 하는 전도(顚倒)를 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탓트바상그라하(Tattvasamgraha)' 334)
② [아트만을 인정한다면] 진실지(眞實智)는 [수행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실지는] 그 [상주하는 지혜]를 본성으로 하는 것으로서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해서는] 이 요가의 수행도 [모두] 진실하지 않은 것이 된다. (같은 책, 335)
이 두 가지는 [이상의 학설들에 대한 중간의] 결론적인 게송이다.
이미 이전에 설했던 [것처럼] 쉬바파가 주장하는 상주하는 유일한 존재의 부정에 의해서 병이나 허공의 유례도 성립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몰입하면 전체가 몰입하는 것이 된다' 든가, '반대로 [한 사람이 해탈]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바람에도 불구하고 [해탈]하지 않는 것이 된다. 상위(相違)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 (허공)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진실을 보는 수행에 의해서 객진 번뇌를 떠나는 것도, 찰나적으로 소멸하는 성질을 갖는 자성청정한 마음에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후의 상태에 결쳐서 청정淸淨[은 청정], 부정不淨[은 부정]이라고 하는 것이 [결정]되어 상위(相違)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확정과 불확정, 미란(迷亂)과 무미란(無迷亂)이라고 하는여러 가지 결정이 말해지는 것도 찰나멸성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 [그대의 입장에서는] 상주이고 유일한 성질은 갖는 주제[인 푸루샤]에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주이고 유일한 성질을 갖는 지식의 주체[인 푸루샤]에 수면(睡眠)과 각성覺醒[이라는 다른] 상태가 설정되는 것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다른 상태가 있는 것은 불합리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두캬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마치 꿈이나 환영 및 간다르바가 [비진실이라고] 보는 것처럼, 이 전세계는 그와 같이 [비진실이다]'라고 베단타에 정통한 현자는 생각한다. (ii.31)
② 소멸도 없고, 생성도 없고, 속박당하는 자도 없고, 수행에 힘쓰는 자도 없고, 해탈을 바라는 자도 없다. 이것이 최고의 진리이다. (11.32)
③ 탐욕과 두려움과 노여움을 떠나 베다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성자에 의해서 희론이 적멸한 불이(不二)의 이와 같은 무분별(無分別)이 보여진다. (ii. 33)
[만약] 그 (베단타의 논자)들이 말하는 것이 여러 희론을 떠나 선서(善逝)에 의해서 설해진 승의제에 근거한 것이라면, [역시] 상서로운 것이 될 것이다.
상주(常住)로서 유일한 자아[인 아트만]의 부정에 의해서 비슈누파의 견해도 부정된다.
쉬바파의 견해도 편재하고 상주하는 자아[인 아트만]과 허공 등을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부정된다. 그 쉬바에 있어서도 상주성(常住性) · 편재성(遍在性) · 작자성(作者性) 등이 진실한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트바(sattva) · 라자스(rajas) · 타마스(tamas)가 평형의 상태에 있는 근본원질(pradhana )을 최고의 자성(自性)이라고 설하는 카필라(Kapila)의 주장도 이전에 설했던 [것처림] 편재하고 상주하는 존재가 부정됨으로써 부정되었다.
2) 슈바굽타
자파(自派)의 어떤 사람들(인 슈바굽타Subhagupta 등)은 '일체법은 무(無)이다' 등이라고 하는 경전의 말을 해석할 때, [그 '무無'란] (1) 비난非難이나, (2) 소량少量 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58) 즉 (1) 여러 사물은 고통스러운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무(無)이다. 중간과 현재의 상태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2) 존재하는 것은 비존재[의 상태]가 많기 때문에 무(無)이다. 처음과 끝, 그리고 미래와 과거에는 [그것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바굽타의] 이런 주장이, 만약 [일체법 무자성을 무(無)로 해석하는 것은] 이전에 검토되어 부정되었기 때문에 여실하게 존재하는 의타기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는 기쁜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바사사(毘婆沙師)와 독자부(犢子部)의 학설에 따르는 것이 되기때문에, '이와 같은 [일체법 무자성]은 오직 상키야(Samkhya) 학파 등의 견해에서 [말하는]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다'라고는 말한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또 이와 같이 [일체법 무자성을 의타기로 해석하는] 설명은 지혜가 예민하지 않은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들 [사물]이 모두 [실체가]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주 58) 무(無)의 의미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예가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종성품(種性品) 제11송에 대한 안혜(安慧)의 주석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小川(Ogawa 1969) p.210.
(2) 비교할 데 없이 뛰어난 공성설; 94-97
그러므로 모니(牟尼)의 왕에 의해서 [설해진] 전면적인 공성의 가르침은 이교도 가운데 어떤 학파[의 교설]과도 공통하지 않는 실로 뛰어난 것이다.
'월등삼매경'에 '일체법은 항상 자성공이다.' (ix. 47a) 라고 설해져 있는 것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도 (용수龍樹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① 매우 미세한 사물에만 생(生)이 있다고 망상하는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인연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12)
② 만약 조금이라도 (승의로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서 (일체법은) 무자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러 경전과 모순하고 세간과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59)
그러므로,
주 59) 연화계(蓮華戒)에 의하면 용수(龍樹)의 말이라고 하지만 (MA, p.325:1), 그 출전이 명확하지 않다.
94.
비슈누파와 쉬바파 등이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습)을 확립하는 근거이고,
세간의 지도자인 (성문이나 독각, 혹은 뛰어난 사람들)
에 의해서도
완전하게 알려지지 않는,
95.
이 청정한 진실眞實의 감로(甘露, tattvamrta)는
청정한 자비를 기초로 하는
여래(如來) 이외에
다른 사람은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달빛처럼 청정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이루어진 이 감로야말로 구제자(救濟者)가 좋은 맛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최상의 지혜와 자비의 극미(極微)를 신체로 해서, 번뇌장과 소지장의 집합을 완전히 떠나 윤희가 계속되는 한, 모든 사물 가운데 가장 높은 자로서 존재한다. 실로 그 [감로]는 처음의 무아無我, [즉 인무아人無我]의 이해에 의해서 지혜가 청정해진 성문과 독각들이 [향수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기 때문에, 하물며 바르지 못한 아견(我見)에 집착하는 쉬바 · 비슈누 · 브라만 등의 영역도 아니다.
96.
그러므로 잘못된 학설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비가 일어다.
자타(自他)의 신체에 오랜 기간의 겁(劫)에 결쳐서 뒤따르는 고통의 원인인 사설(邪說)의 법을 가르치는 스승과 그 [사설]에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희구(希求)된 진실지에 근거해서 최승(最勝)의 진실을 가르쳐서 끝내고, 자비라는 가문(家門)을 집으로 하는 선서의 가르침을 승인하고, 인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현자들의 조그마한 대립도 보태지 않는 대자비가 생겨난다. 타인이 고통에서 떠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대자비이다. 그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이 증대할 때 [자비는] 생겨난다. 마치 장작을 넣으면 불이 타는 것과 같다.
승의에 대해서 증오하는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의 정점에 서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적의(敵意) 밖에는 없다. 후자[인 자타에 대한 적의]는 바람에 흔들려서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실은 덧없는 것이고, 스스로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고통이 되어 다만 하나의 신체를 죽일 뿐이다. 그러나 한편 전자[인 승의에 대해서 증오를 품는 자]는 윤회가 지속하는 한 존재하게 되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원만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헤아릴 수 없는 승자(勝者, jina)와 결합한 법신을 손상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법신]의 종자인 법의 진실을 믿고 이해하는 것을 손상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한] 정법正法의 훼손에 대한 끝없는 여러 가지 과보가 경전에 설해져 있다. 또 다음과 같이 [논서에도] 설해져 있다.
① [대승은] 지극히 광대하고 지극히 깊다. [그러므로] 원기(元氣)가 없는 무지한 자타(自他)의 적(敵)은 어리석게도 지금 대승을 비방한다. ('라트나발리(Ratnavali)', iv. 79)
② 계율이 모자란 것은 차라리 좋지만 지혜가 모자란 것은 결코 좋지 않다. 계율에 의해서는 도리천(忉利天)에 도달하지만 지혜에 의해서는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백론', xii. 11)
③ 무지(無知)에 덮혀서 진여를 방해하는 사람에게 선(善)의 증득은 없다. [그런데] 하물며 해탈이 있겠는가? (같은 책, xii. 10)
④ 장해(障害)의 종자가 되어 있는 많은 이교도를 보면서, 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같은 책, xii. 18)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가운데 첫 번째 인(忍)의 특성을 말하는 곳에서 ['이교도들에게 동정심을 일으커라'라고] 60)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실로 마치 매우 아름다운 태양빛이 설산(雪山)의 눈에 닿으면 [그 눈이] 녹고 마는 것처럼, 타파의 학설을 검토해 보면 [그것은] 깊이 침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비는 사람은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또 나는 자파 및 타파의 사상 체계를 상세하게 음미해서, 여러 희론의 모임을 떠난 인연생(因緣生)을 '진리강요(진리강요), Tattvasamgraha)' 및 '승의제의 확정(Paramarthaviniscaya)' 61) 등에서 검토했기 때문에, 더욱 상세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통해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 60) '삼매왕경(三昧王經)' vii. 6.
주 61) 이 서명(書名)은 TS k. 2083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범문 원본이나 티벳트역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TS나 본서보다 먼저 나온 적호(寂護)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97.
마음에 [지혜라는] 보물을 가진 사람은 타파(他派)의
학설에서
진실(眞實, sara)을 보지 않으며,
그 대신 그들의 수호자에 대해서는
실로 존경을 일으킨다.
타파의 학설에서는 카스트 밖의 천민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만 알려진 조잡한 내용의 상황에 대해서만 오류를 본다. 그러나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청정해서, 아름다운 순금과 같이 태우거나 끊거나 갈아도, 직접지(直接知)와 추론(推論)과 자신의 말에 모순하지 않고, 윤회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혼동되지 않는 지혜의 진실을 따르고, 여래의 가르침에는 잡란(雜亂)이 없는 것을 알아서, 인간계와 천상계에 있는 여러 지도자의 관(冠)에 장식되어, 연꽃 위에 아름다운 발을 딛고 계신 세간의 스승[에 대해서], 무집착의 이론에 근거하는 수행을 핵심으로 하는, 신해(信解)를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가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해진다].
① 현자는 진실지를 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서, 그 내용을 인식하고 나쁜 견해가 모여 있는 세간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널리 지니고,
② 용감하게 세간에 이익이 되는 것을 실천하고, 광대한 보리심을 가지고 지혜와 자비로 꾸며진 모니(牟尼)의 서원을 실천한다.
③ [한편] 올바른 수신행자(隨信行者)는 보리심을 일으커서 모니의 서원을 받아들이고, 진실지를 구하는 것에 노럭한다.
④ 예민한 지혜의 눈을 가진 현자들은 도(道)를 발전시커서, 명료한 경전의 가르침과 논리를 가지고 그와 같은 방향[의 가르침]만을 설한다.
⑤ 이 세계에서 청정한 달과 같은 공덕을 나는 얻었지만, 그 공덕을 가지고 승자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진실을 기쁘게 생각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악견(惡見)이라는 어두움이 매우 많은 그물을 제거하고 생존의 애욕을 제거해서 보리를 얻는 것,처럼.
⑥ 나도 [가르침의] 대상이었던 기쁨을 경험하고, 원기를 없애는 암흑을 제거하여, 최고의 진리를 이해하고, 진실지를 가지고, 이타(利他)에 일념으로 전념해서, 청정한 문수사리의 자리 옆에서 굳건하게 공경하리라.
⑦ 명료한 경전의 가르침과 논리에 근거해서 여기에서 [내가] 설한, 가장 위대한 승자의 경전이라는 큰 등불을 올바르게 밝힌 [이 책]은, 세간에서 사물의 실체적인 자성이 버려지지 않는 한 어떤 일이 있어도 틀림없이 계속될 것이다.
⑧ 인연생(因緣生)과 맹렬한 망분별(妄分別)의 여러 그물[로부터]의 해탈을 설하신 승자에게 항상 언제나 귀명하노라.
⑨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내가 지은 이 '중관의 장엄'은, 논리와 여러 가지 경전의 가르침이라는 보물을 아로새겨서 꾸며져 있다.
⑩ 예민한 지혜에 의해서 이것을 이해하여 깊은 지혜를 가진 찬드라푸라바 태자(太子) 등과 [같이] 지혜의 재산을 가진 굳건한 사람들은 두려움없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⑪ 굳건한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잘 이해하고 설시하는 것은 자타(自他)에 두루 미치는 최상의 만족을 가져 온다.
⑫ [나는] 염치없는 모든 유외경론자(有外境論者)의 만심(慢心)을 제거하고, 변재(變才)라는 자유자재한 표현 능력을 가지고 큰 교만을 경멸할 것이다.
⑬ [그러므로] 깊고 깊은 법의 진실을 설하신 대모니의 명성은 사방에 널리 한층 증대할 것이다.
⑭ 법무아를 행하기 위해 약 천 명의 스승에 의해서 여러 수행이 실천되었지만, 평등하게 두루 미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⑮ 현자들은 이 청정한 진실을 알아서, 지금은 생각대로 무구(無垢)한 것과 관계되이 있는 것을 확정한 수 있다.
⑯ 그 [진실]을 비방하거나 비방을 본성으로 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 부정적 필연관계를 가지고 용이하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중관의 장엄(莊嚴)'은 자타파(自他派)의 학설의 바다에서 피안에 도달하여, 존경하는 문수사리의 청정한 대좌(臺座)라는 꽃술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스승 적호(寂護)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인도의 학승 시렌드라보디(Silendrabodhi), 대교열번역관(大校閱飜譯官) 예세데(Ye shes sde)에 의해서 번역되고 교정되고 확립되었다.
● 부록-"중관장염론 에 대하여 ※62)
(1) 중관학파의 공사상
'중관장엄론(中觀莊嚴論)'은 후기 중관학파의 논사인 적호(寂護, Santaraksita, 725~784년경)의 저술로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에서 활동했던 불교와 비분교의 제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모든 사물들이 실은 무자성(無自性)ㆍ공(空)으로서 진실로는 실제가 아님을 입증하고자 한다.
일찍이 인도철학의 제 학파는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파니샤드와 베단타(Vedanta)의 아트만과 브라만, 상키야(Samkhya)의 푸루샤와 프라크리티, 바이세시카(Vaisesika)의 실체(실체, dravya) 등은 모두 그와 같은 궁극직 실재에 대한 탐구 결과 상정된 것들이다.
※62) 이 글은 편역자의 다음 글들을 근기로 해서 작성되었으므로, 보다 자세한 사항들을 알려면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남수영, (2007); '중관학파의 심유 비판 연구', 한국학술정보(2004); '인도불교에서 중관학파 공사상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연구', '보조사상' 제21집, (2006); '중관학파의 공사상에서 자비의 성립과 완성', '보조사상' 제25집.
당시의 인도 사상은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로 대표되는데, 전변설에 따라 전변의 궁극을 추리하면 궁극적 실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되고, 적취설에 따라 적취의 궁극을 추리하면 궁극적 실재는 단일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궁극적 실재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이거나 단일한 사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영원한 과거로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사물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의 유사하게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단일한 사물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궁극적 실재는 일반적으로 상주불변(常住不變)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붙타(佛陀)는 연기설을 주장하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하였다. 불타는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무기(無記), 혹은 부정의 태도를 취하였으나, 시대의 흐름과 함께 불교의 제 학파에서도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제 학파들은 궁극적 실재를 승의유(勝義有)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였다. 설일체유부는 과거 ㆍ 현재 ㆍ 미래의 5위 75법이 모두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였고, 경량부는 현재 한 순간 작용하고 있는 색법(色法)과 심법(心法)만이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궁극적 실재의 개념도 서로 달라서, 설일체유부는 분석의 궁극이 있는 단일한 사물을 주장하였지만, 경량부는 효과적 작용 능력이 있는 사물을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불교 제 학파에서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게 되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연기(緣起)에 대한 편협한 해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연기를 일방적(一方的) 의존의 연기로 이해하여 의존의 궁극을 생각하게 되면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현상적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연이 되는 사물이 미리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반야경'은 불교의 제 학과들이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를 반대하면서 일체의 사물이 공임을 주장하였다. 용수(龍樹, nagarjunia, 150~250년경)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하여 일체의 사물이 공임을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연기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일방적 의존의 연기를 생각한다면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상호의존의 연기를 생각하면 궁극적 실재는 부정될 수 있다. 즉 일체의 사물은 항상 다른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발생하고 존재하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는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수는 그와 같은 사물의 실상(實相)을 무자성 • 공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자성(自性)이라는 말은 본래 '독자적 존재'라는 의미이지만,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사물의 고유한 속성, 혹은 사물의 본질(本質)이다. 그리고 그 본질이야말로 그 사물을 그 사물로서 존재하게끔 하는 것이므로, 자성은 그 사물의 실체(實體), 혹은 그 사물의 자체(自體)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무자성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이 고유한 속성이나 본질, 혹은 실체나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용수는 일체의 사물은 연기(緣起)이고, 연기이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자성의 비존재나 자성의 결여를 공(空)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무자성 ㆍ 공이란 일체의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유한 속성이나 본질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단지 가명(가명)일 뿐이고, 또한 존재로서의 고유한 본질도 가지지 못하고 비존재로서의 고유한 본질도 가지지 못하므로, 비유비무(비유비무)의 중도(中道)라고 말한다.
불교의 제 학파들은 그와 같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해서 일제히 반발하여,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불타의 가르침과 해달을 위한 실천 수행을 모두 불가능하게 하는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불교 제 학파들의 반발은 매우 격렬한 것이었다. 동일하게 대승을 표방하였던 유가행파도 일체법이 현현하는 근거로서의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허망분별의 결과인 소취(所取)와 능취(能取)가 사라져 버린 상태인 진여(眞如) 즉, 공성(空性)은 궁극적 실재라고 주장하면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허무론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유가행파는 용수(龍樹) 이후에 나타났기 때문에 유가행파의 비판에 답하는 일은 중기 및 후기 중관학파의 논사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되있다. 따라서 중기 및 후기 중관학파의 논사들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인도칠학의 제 학파 뿐 아니라, 유가행파를 포함하는 불교의 제 학파들이 상정하는 모든 궁극적 실재를 비판하고 공사상이 최고의 진리임을 다시 한빈 논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적호와 '장관장엄론'
후기 중관학파의 논사인 적호(寂護)는 논리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립논증식(自立論證式)을 통해서 다른 여러 학파를 조직적으로 비판하는 점에서 중기 중관학파의 논사인 청변(淸辨, Bhavaviveka, 500~570)의 방법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청변이 단지 논리학만을 구사하여 다른 학파의 사상을 병렬적으로 비판했던 것에 비해서, 적호는 법칭(法稱, Dharmakirti, 600-660년경)의 인식론을 수용할 뿐 아니라. 불교 제 학파의 사상은 모두 중관사상에 이르기 위한 예비적인 단계라고 생각하여 각 학파의 사상에 순위를 부여하고, 그들 각 불교 학파들이 제시하는 궁극적 실재를 종합적이고 조직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청변과 다르다.
따라서 적호의 중관사상은 용수와 청변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 및 중기 중관학과 이후에 큰 발전을 이루었던 경량부와 유가행파의 사상을 수용하고, 그것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용수 및 청변의 중관사상과는 다르다.
적호의 사상적인 특징은 자립논증파에 속한다는 것, 법칭의 인식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 다른 불교의 학파들과 대결하기보다는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다른 불교 학파들의 사상보다 높게 평가하여, 다른 불교 학파들의 사상을 중관사상을 향한 발달의 단계로 취급하여 중관사상의 체계 속으로 흡수하고자 했던 것 등을 들 수 있다.
적호는 '중관장염론'에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일체의 사물이 무자성 · 공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첫 번째 방법은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사물들이 단일성(單一性)과 다양성(多樣性)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자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적호는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일한 것과 다양한 것이라는 둘 가운데 하나이며, 그 밖의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호는 그와 같은 전제 하에서 여러 학파들이 궁극적 실제로서 제시하는 사물들이 단일성이나 다양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그리고 만약 그 사물이 단일성이나 다양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음이 입증된다면, 결국 그 사물은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서 진실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님이 입증된다고 생각한다.
적호는 '중관장업론'의 제1송에서 불교와 비불교의 제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사물들이 단일성과 다양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림자와 같이 무자성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중관장업론'의 논리적 구조를 볼 때 이 게송은 주장명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제2송부터 제62송까지는 논리에 근거하여 제63송부터 제90송까지는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증인(證因)과 비유(譬喩)를 제시하여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논증해 나간다. 결국 적호는 '중관장엄론'을 유가행파의 논사인 진나(陳那, Dignaga, 480-540경)의 논리학에 따라서 모든 사물이 무자성이 라는 주장명제(=宗)의 논리적 이유(=證因)가 되는 것은 바로 '모든 사물은 단일성이나 다양성을 가지지 얂는다'라는 것이다.
직호가 말하는 단일성과 다양성이란 설일체유부의 궁극적 실재 개념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서 궁극적 실재란 각종으로 분석하더라도 그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사물을 말한다. 즉 설일체유부에서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단일한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며, 그런 이유로 그 사물은 궁극적 실재라고 인정된다. 그리고 설일체유부는 궁극적 실재인 단일한 사물을 연으로 해서 복합적 사물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적호가 말하는 단일성과 다양성이란 곧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실유(實有)와 가유(假有), 혹은 승의유(勝義有)와 세속유(世俗有)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적호에 따르면,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사물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 결국 그것들의 단일성은 성립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복합적인 사물은 단일한 사물이 적집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물의 단일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다양성도 성립한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불교와 비불교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모든 사물들은 단일한 사물도 아니고 복합적인 사물도 아님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그들 여러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모든 사물은 진실로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일한 것도 아니고 복합적인 것도 아닌 제3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호는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사물들이 과연 정말로 단일한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그들 제 학파들이 제시하는 궁극적 실재들이 실은 모두 무자성으로서 다만 그림자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적호가 '중관장엄론'에서 궁극적 실재를 난파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첫 번째 방법이다.
적호가 궁극적 실재를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두 번째 방법은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된 사물들이 과연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본래 효과적 작용 능력이 있는 것을 궁극적 실제로 간주하는 것은 경량부의 사상이다. 경량부에 따르면 효과적 작용 능력이 있는 사물은 반드시 찰나멸의 사물이며, 영원한 사물은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경량부는 영원한 사물은 개념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적호는 이미 진리강요(眞理綱要, Tattvasamgraha)에서 그와 같은 경량부의 사상에 따라서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궁극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영원한 사물을 논파하기도했다. 적호는 '중관장엄론'에서 그와 같은 방법을 다시 한번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제시하는 궁극적 실재의 비판에 적용하였다. 그러므로 적호는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제시하는 궁극적 실재를 논파하고, 모든 사물이 무자성임을 논증하기 위해서 단일성과 다양성의 유무 검토 및 효과적 작용 능력의 유무 검토라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두 가지 방법은 사세속(邪世俗, mithya-samvrti)과 실세속(實世俗, tathya-samvrti)을 구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세속이란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개념의 허구를 말하며, 실세속이란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기는 하지만 단일성과 다양성 유무의 검토라는 더욱 엄격한 비판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물을 말한다. 따라서 적호는 단일성과 다양성의 유무 검토와 효과적 작용 능력의 유무 검토라는 두 가지의 비판 방법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우선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사물은 다만 개념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세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존재로서 승인하는 것도 아니므로 사세속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물이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인정된다면, 그것은 다시 단일성과 다양성의 유무를 검토함으로써 더욱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
만약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일한 사물임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한편 어떤 사물이 그런 검토를 통해서 궁극적 실재가 아님이 입증되었다고 하더라도, 효과적인 작용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물은 세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존재라고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적인 진리에 따라서 그 사물을 존재로서 인정한다. 이처럼 궁극적 실재는 아닐지라도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간적인 진리에 따라서 존재로서 인정되는 사물이 실세속이다. 이처럼 적호는 '중관장엄론'에서 단일성이나 다양성을 가지는 사물 및 효과적 작용 능력을 가진 사물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함께 적용하여 검토함으로써 여러 학파들이 제시하는 사물 가운데 진실로 궁극적 실재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3) 종관학과 공사상의 실천적 의미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궁극적으로는 어떤 사물의 존재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제시하는 모든 궁극적 실재들을 비판하기 때문에 파괴적이고 허무론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우 깊은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체의 사물을 무자성 · 공으로 보는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번뇌도 열반도 모두 무자성 · 공으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심지어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 철저한 무집착( 無執着)을 실천 수행의 목표로 삼을 수가 있게 된다.
열반이란 수행자의 최고 목표이지만 그것에 집착한다면 진정한 열반을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열반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 철저한 무집착을 주장함으로써 가장 완진한 상태의 열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비(慈悲)와 보시(布施) 등의 이타행(利他行)도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의해서 비로소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승화된다. 왜냐하면 중관학과의 공사상에 의하여 비로소 주는 자, 받는 자, 주어지는 사물 등을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가 가능해지고, 자비를 행하는 주체와 자비가 행해지는 대상을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무연(無緣)의 자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종교적 실천행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청정한 것으로 완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관학파에 의하면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것은 사물의 실상에 대한 왜곡인 동시에 무지의 표출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왜곡과 무지야말로 온갖 고통과 번뇌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무자성 · 공인 사물의 실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들이 생겨나며, 그런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온갖 고통과 번뇌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중관학파에게 진정한 사물의 실상은 일체의 사물이 무자성ㆍ공이라는 것이었으며, 그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수행자로 하여금 일체의 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끊고 진정한 열반의 상태에 도달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이유로 중관학파는 끊임없이 불교와 비불교의 제 학파들이 상정하는 궁극적 실재를 비판하여 무자성ㆍ공성이라는 사물의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논사論師의 사상이 망라되어 있는 저술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중관장엄론'에 대한 더욱 자세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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